나주임씨(羅州林氏)
【시조】임비(林庇)
【인구】236,877명 (2000년 현재)
【주요파】▲장수공파 ▲정자공파 ▲절도공파 ▲첨지공파 ▲도정공파 ▲진사공파
시조 임비는 고려 충렬왕 때 대장군이었다.
시조의 9세손 임탁이 해남 감무를 지내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회진으로 낙향하여 살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나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본래는 회진임씨(會津林氏)였으나 회진이 나주에 속하게 되면서 나주임씨로 바꾸었다.
임붕은 중종조에 유생들과 함께 조정암을 구명하는 상소를 올렸다. 경주 부윤을 거쳐 광주목사를 지냈다.
백호 임제는 조선 선조 때 예조정랑 겸 지제교를 지냈다.
당시 동서 양당의 싸움을 개탄하고 명산을 찾아다니며 여생을 마쳤다.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화사(花史)", "수성지(愁城志)", "백호집(白湖集)", "원생몽유록", "남명소승" 등의 글을 남겼다.
석촌 임서는 병조좌랑을 지냈다. 그 후 인조반정으로 안동부사가 되었다.
같은 해에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적폐(積幣)의 시정과 농사의 장려에 힘썼다.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워 동지중추부사가 된다.
임담은 병자호란 때 총융사의 종사관이 되어 수비에 종사했다.
청과의 화의 성립 후 진휼어사로 호남을 순시했다. 1639년 좌승지로 사은부사가 되어 청에 다녀왔다.
그 후 도승지. 이조판서를 거쳐 판의금부사에 올랐다.
조선조 나주임씨의 후손 중에서 상신(相臣)에까지 오른 인물로 임한호가 있다.
정조 때 수찬, 북평사, 암행어사 등을 지냈다. 순조 3년에는 대사간이 되었으며
그 뒤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1821년(순조 21년)에 우의정에 올랐다.
임한수는 헌종 때 정언, 교리 등을 지냈으며 1861년 종부사정으로 "선원보략(璿源譜略)"의 재간(再刊)에 참여했다.
양주목사, 강원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를 지낸 후 1886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20세기에 들어와서 활동한 인물로는 임병직이 있다.
1919년 미국에서 3.1운동촉진회를 조직, 임시정부 대통령 비서관을 지냈다.
이승만과 함께 구미의원부를 개설, 미국 19개 도시에 한민친선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이승만의 후임으로 구미의원부 의장에 임명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때부터 1951년까지 외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51년부터 1960년까지는 유엔주재대사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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